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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宮]/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덕수궁]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원래 왕족의 집인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선조가 거처를 정하면서 임시 사용하는 궁이 되었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때에 이르러 비로소 경운궁으로 고쳐 불렀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고종황제가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 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화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04년의 큰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 원래 명칭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4년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서관

동관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하였다.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광명문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

1904년(광무 8) 함녕전은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다. 1938년 덕수궁 미술관을 개관할 때 이 문을 흥천사 종과 누각을 진열하기 위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구여당


 한중일 삼국의 양식이 혼합된 절충식 건물인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