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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宮]/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 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정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경복궁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이다.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정정, 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 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 정궁의 대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편전(便殿)인 사정전·침전인 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殿)·강녕전(康寧殿) 등을 지어 궁궐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우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다시 짓게 하였다. 1927년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경복궁의 여러 곳이 헐리고 총독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광화문은 6·25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되어 고종연간의 중건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복원되었다.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의 모습. 앞으로 중학천이 흐르고 있고 중학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십자각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된 광화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현재 중학천은 없어지고 도로로 복개되었고 동십자각은 궁궐 담장이 헐리면서 섬처럼 떨어졌다.

영추문

경복궁의 서문.  경복궁 서측으로 전차가 다녔는데,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왼편 담장이 붕괴됐다. 붕괴된 이후 복원되지 않고 1926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렸고 현재의 자리에 1975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경회루에서 바라본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270여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근정전에서 바로본 근정문과 총독부 건물.

근정문 넘어로 지금은 헐린 총독부 건물이 우리 역사의 씁쓸함을 보여준다.

사정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 다포집. 1867년(고종 4) 건립. 왕이 일반 업무를 보던 집무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집옥재팔우정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전각. 원래는 팔우정·협길당과 함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