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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宮]

왕의 주 업무 공간 사정전 근정전 정북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살피던 곳이다. 근정전이 국가의 중요행사를 했던 곳이라면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로 보면 된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 때에는 이미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에 중건된 것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사정전 동문에서 바라본 사정전 일대 모습. 사정전 서쪽으로 천추전, 동쪽으로 만추전이 있는데 사정전은 온돌이 없는 마루여서 겨울철에는 천추천, 만추전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임금님이 거하시던 곳이라 이곳 역시 일월오봉도가 용.. 더보기
근정문, 근정전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근정문 양쪽으로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근정전 북쪽으로 사정문(思政門)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이다. 근정문 너머로 근정전이 보인다. 신하들은 근정문 양 옆의 월화문, 일화문으로 다녔고 근정문은 왕이 출입하던 문이다. 근정문에서 바라본 근정전. 가운데로 어도(임금님이 다니는 길)가 나있고 양옆으로 신하들이 다니던 길이 있다. 그 길 양 옆으로 품괴석이 세워져 있고 근정전 .. 더보기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1395년(조선 태조 4)에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지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 이후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일제시대때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는데, 1996년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영제교, 금천과 함께 복원하였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흥례문이 보이고 그 앞으로 임금님이 다녔던 어도가 보인다. 어도와 흥례문은 복원된 것. 흥례문에서 표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근정문이 보이고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로 영제교와 금천를 볼 수 있다.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 더보기
광화문 [光化門]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편전(便殿)인 사정전·침전인 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殿)·강녕전(康寧殿) 등을 지어 궁궐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우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다시 짓게 하였다. 1927년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경복궁의 여러 곳이 헐리고 총독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광화문은 6·25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가..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궁궐 사진전을 다녀온게 2008년 2월 27일인데, 이제야 정리하며 블로깅을 하니 나도 참 대단하다. 블로그를 2010년에 만들었다는게 위안이 되려나...ㅡㅡ; 아무튼 안타까운 마음으로 관람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의 마음이 전해진다. 조선의 궁궐 궁궐은 단순히 왕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군위의 상징이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거기에 여러 궁궐을 조성하였다. 조선이 수도 한양에 지은 대표적인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다. 이 가운데 경복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지은 정궁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빈 터로 전하다가 1867년 복원하였다. 태종 때 지은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다. 경복..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경희궁]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때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 평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 건물들이 대부분 없어졌다. 일부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동국대학교로 흥화문은 박문사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졌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겨진 글이 남아있다. 경희궁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의 정문이 2층으로 지어진 것..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창경궁] 창경궁은 수강궁터에 성종이 1483년에 지었다. 조선시대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 정조, 순조, 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 정전들이 보존되어 있다.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창덕궁] 1405년 태종5년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탔는데 곧 바로 다시 지은 후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 대체로 원래의 궁궐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덕수궁]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원래 왕족의 집인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선조가 거처를 정하면서 임시 사용하는 궁이 되었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때에 이르러 비로소 경운궁으로 고쳐 불렀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고종황제가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 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화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04년의 큰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 더보기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 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