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년 태종5년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탔는데 곧 바로 다시 지은 후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 대체로 원래의 궁궐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인정전[국보 제225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다포 집으로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영친왕 내외 일행의 기념사진

1922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 일행이 귀국했을 당시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던 모습이다.

영화당 앞 영친왕내외


어수문

어수문은  정조 즉위년(1776)에 지은 2층 건물인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어수문 양 옆 협문으로 드나들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조선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였다.


창덕궁 희정당에 영친왕비가 차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


금천교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 물길 위에 설치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돌다리이다.

윗부분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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