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궁궐 사진전을 다녀온게 2008년 2월 27일인데, 이제야 정리하며 블로깅을 하니 나도 참 대단하다. 블로그를 2010년에 만들었다는게 위안이 되려나...ㅡㅡ; 아무튼 안타까운 마음으로 관람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의 마음이 전해진다.

조선의 궁궐

궁궐은 단순히 왕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군위의 상징이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거기에 여러 궁궐을 조성하였다. 조선이 수도 한양에 지은 대표적인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다. 이 가운데 경복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지은 정궁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빈 터로 전하다가 1867년 복원하였다. 태종 때 지은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다. 경복궁이 불타버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희궁과 함께 조선 왕실의 주요 무대였다.

경희궁은 본래 왕족의 사저였으나, 이곳에 왕기가 있다고 하여 광해군이 빼앗아 왕궁으로 증축하였다. 창경궁은 성종이 3명의 대비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증축한 것이다. 본래 이름이 경운궁인 덕수궁은 선조가 거처하였으며, 광해군 때부터 경운궁이란 정식 이름을 붙였다.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중심 황궁이며, 덕수궁이란 이름은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당한 후 거주하면서 생겼다.

이 밖에 서울에는 인덕궁, 인경궁, 용동궁, 이현궁, 창의궁, 운현궁, 본궁, 별궁 등 많은 궁이 있었다. 그리고 지방에는 온천이 있는 온양, 태조가 상왕 때 머문 풍양, 한양을 수호하는 남한산성, 북한산성, 정조가 건설한 화성 등 전국 각지에는 행궁이 있었다. 또 조선 왕실의 고향인 함경도 함흥 및 영흥이나 왕실과 인연이 깊었던 곳에는 본궁과 왕이 즉위 이전에 살았던 집인 잠저라는 작은 궁궐이 다수 있었다.


숭례문[국보 1호]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전기의 성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건물은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 2월에 준공되었다. 그뒤 1447년(세종 29) 개수공사가 있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소실되어 재건중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문화재가 현대에 들어와 방화로 소실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총독부 건물에서 바라본 현 세종로. 광화문을 이전하고 담장을 헐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구 국립중앙 박물관 내부

총독부 발물관

일제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동궁터에 서양식 정원을 꾸미고 박물관을 건립했다. 현재 박물관은 헐리고 정원 자리에는 동궁이 복원되었다. 오른편으로 건춘문(경복궁 동문)이 보인다.

해태

공포

해태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한자어로는 해치(獬豸)라고 한다.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한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받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믿어져서, 법을 심판하는 사람은 해치관이라 하여 해태가 새겨진 관모를 쓰기도 하였다. 또,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간주되어 궁궐 등의 건축물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광화문 앞에 놓여 있고, 경복궁 근정전의 처마마루에도 놓여 있는데, 이것은 전각 안에서 정사를 돌보는 임금의 공평무사를 비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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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9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2.06.29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때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 평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 건물들이 대부분 없어졌다. 일부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동국대학교로 흥화문은 박문사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졌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겨진 글이 남아있다.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의 정문이 2층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흥화문은 1층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경희궁이 이궁(離宮)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절문으로 이용되었다. 그 뒤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거나 파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숭정전

1617~1620년 사이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는데 민족항일기인 1926년 현 위치(동국대학교 내)로 옮겨져 현재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일본인들이 강제로 철거하여 팔아 넘긴 탓으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었고, 교실·체육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는 불교식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도록 내부가 변경되어 있다.
태그 : 숭정전,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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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수강궁터에 성종이 1483년에 지었다. 조선시대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 정조, 순조, 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 정전들이 보존되어 있다.

홍화문[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앙구일부(해시계) 보물 제845호
1434년(세종 16) 장영실이 처음 만든 앙부일구는 종로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쌓은 석대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2개의 앙부일구는 그로부터 2∼3세기 후에 만든 것으로 전의 것과 제작 기법이 같다. 현재 복원된 모습은 원래의 모습과 다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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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태종5년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탔는데 곧 바로 다시 지은 후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 대체로 원래의 궁궐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인정전[국보 제225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다포 집으로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영친왕 내외 일행의 기념사진

1922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 일행이 귀국했을 당시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던 모습이다.

영화당 앞 영친왕내외


어수문

어수문은  정조 즉위년(1776)에 지은 2층 건물인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어수문 양 옆 협문으로 드나들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조선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였다.


창덕궁 희정당에 영친왕비가 차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


금천교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 물길 위에 설치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돌다리이다.

윗부분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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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원래 왕족의 집인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선조가 거처를 정하면서 임시 사용하는 궁이 되었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때에 이르러 비로소 경운궁으로 고쳐 불렀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고종황제가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 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화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04년의 큰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 원래 명칭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4년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서관

동관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하였다.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광명문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

1904년(광무 8) 함녕전은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다. 1938년 덕수궁 미술관을 개관할 때 이 문을 흥천사 종과 누각을 진열하기 위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구여당


 한중일 삼국의 양식이 혼합된 절충식 건물인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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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 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정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경복궁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이다.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정정, 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 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 정궁의 대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편전(便殿)인 사정전·침전인 경성전(慶成殿)·연생전(延生殿)·강녕전(康寧殿) 등을 지어 궁궐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우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다시 짓게 하였다. 1927년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경복궁의 여러 곳이 헐리고 총독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광화문은 6·25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되어 고종연간의 중건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복원되었다.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의 모습. 앞으로 중학천이 흐르고 있고 중학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십자각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된 광화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현재 중학천은 없어지고 도로로 복개되었고 동십자각은 궁궐 담장이 헐리면서 섬처럼 떨어졌다.

영추문

경복궁의 서문.  경복궁 서측으로 전차가 다녔는데,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왼편 담장이 붕괴됐다. 붕괴된 이후 복원되지 않고 1926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렸고 현재의 자리에 1975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경회루에서 바라본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270여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근정전에서 바로본 근정문과 총독부 건물.

근정문 넘어로 지금은 헐린 총독부 건물이 우리 역사의 씁쓸함을 보여준다.

사정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 다포집. 1867년(고종 4) 건립. 왕이 일반 업무를 보던 집무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집옥재팔우정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전각. 원래는 팔우정·협길당과 함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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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4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7.02.24 18:42 김가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댓글을 확인할 수가 없네요ㅠㅠ
    다시 한 번 복사해서 답글을 달아주실 수 있을까요?

    • newdoll 2017.02.25 06: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동네의 사생활 방송의 좋은 취지를 알기에 사용하신다면 저로서도 영광입니다 ^^ 다만 사진을 제가 촬영하긴 했으나 저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에서 찍은 것이기에 유리건판에 대한 저작권 여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 혹시라도 모르니 이점은 확인을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3. 2017.02.27 12:04 김가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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