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vel book/산[山]

인왕산

독립문 보고 경복궁으로 가는길에 인왕산을 거쳐가기로 마음을 먹고 인왕산을 올랐는데 완전 고생을 했다. 인터넷 정보는 역시 100% 믿어서는 안될듯 싶다. 

인왕산 등산로 - 클릭시 확대 [출처 : 다음지도]

다음지도도 그렇고 네이버 지도도 국사당 뒤로 해서 바로 성곽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표시되어있다. 하지만 가 보았더니 등산로는 없었다. 한 할머니께 여쭤보니 등산로 없단다. 그리고 하시는 말 인터넷 믿지 말란다. ㅡㅡ;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니 더 황당하다. 아무튼 성곽아래로 난 길을 따라 돌아나와 등산로로 갔더니 이런... 성곽 복원 공사로 입산 통제란다. ㅡㅡ 아 이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올걸 ㅠㅠ 할수없이 길따라 옥인아파트까지 가서 등산을 시작했다.

서대문 역에서 멀리 범바위 능선이 보인다.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 아파트만 없었어도 더 멋있게 보였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을을 조금 지나 언덕을 오르면 인왕사 가는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좀더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왕산 선바위.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선바위 위에서 국사당을 바라보니 지붕에 비둘기 천지다. 선바위에도 비둘기들이 많았는데, 참선하는 곳으로 배설물이 떨어지지 않게 비닐을 쳐놓았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래 3칸 이었는데 양쪽으로 증축을 해 현재 5칸 건물이다.

국사당 윗길로 좀만 오르면 우측으로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쪽 등산로를 따라 돌아 나가던가 왔던 길로 돌아나가 다시 언덕을 좀 더 올라야 성곽등산로가 나온다. 하지만 5월 27일까지는 성곽 공사로 이쪽으로 입산은 금지되어 있다.

좌측 성곽끝에서 부터 등산로가 시작되지만 지금은 입산이 금지되어 갈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옥인아파트 뒤까지 길을 따라 걸어간후 거기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옥인아파트 등산로에서 얼마 오르지 않으니 인왕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좀만 오르면 종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나타난다.
경복궁과 종로 일대의 건물들이 보인다. 저 멀리 동대문 두산타워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좀 더 오르니 성곽길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북쪽으로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왕산 기차바위

북쪽으로 홍은, 부암, 평창동이 보인다.  저 멀리 북한산 능선 뒤로 갈현동도 보인다. 약한 연무가 있었지만 날이 좋아 멀리까지 보였다. 정상에 올랐을때 주변 경치를 보자면 올라올때의 힘들었던 생각은 잊혀지는 것 같다.

동남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남산타워부터해서 그림같이 펼쳐진다. 이렇게 보니 서울이 빽빽하긴 하다. 사진을 올리긴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청와대방면의 촬영은 금지되어있었다. 그래서 이미지를 축소해서 올렸다. ㅎ 그래도 혹시 모르니... ㅋ

하산길. 바위의 색깔로 복원된 부분과 조선시대에 쌓은 성곽을 구분할 수 있고 성곽의 쌓인 돌의 모습으로 어느 시대에 쌓여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창의문에 다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윤동주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을 한다. 이때 직접 지은 유작들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고, 시집의 서문으로 지어진 것이 ‘서시’다. 그리고 수십편의 유작중 ‘서시’와 ‘별 헤는 밤’ 등이 지어진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언덕 동쪽으로 창의문이 보이는데 도로를 내느라 성곽이 끊어졌고 흉물스럽게 시멘트로 담을 만들었다. 수원 화성처럼 아치교 형태로 연결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창의문에서는 북안산성 둘레길을 갈 수 있다. 오후 3시까지 입산 가능하니 입산을 원하는 분들은 3시전까지 신분증을 지참하고 안내소에 가면 된다.


창의문은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월 16일에 상량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