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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31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2. 2011.11.09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 [창덕궁]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Posted by newdoll 궁[宮]/경복궁 : 2011. 12. 31. 22:49

흥례문

1395년(조선 태조 4)에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지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 이후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일제시대때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는데, 1996년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영제교, 금천과 함께 복원하였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흥례문이 보이고 그 앞으로 임금님이 다녔던 어도가 보인다. 어도와 흥례문은 복원된 것.

흥례문에서 표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근정문이 보이고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로 영제교와 금천를 볼 수 있다.

영제교(금천교)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고도 불렀는데, 경복궁의 금천교를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를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를 옥천교(玉川橋)라고 하여 별도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고 한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다리이며, 세종 8년(1426) 영제교라고 이름지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해체되었고, 해체된 석재 일부가 수정전(修政殿) 앞에 방치되어 있다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이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후 흥례문 일곽을 중건하면서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하였다.

금천

금천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고 한다. 금천으로 백성과 왕의 영역이 구분되어지고, 궁에 입궐하는 사람들은 이 금천을 지나면서 모든 악한것을 물에 씻어 보낸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아시아 국가에서는 다 비슷한것 같다. 예전 캄보디아를 갔을 때 앙코르와트 유적을 방문했었는데, 거기도 유적 주위로 해자를 파고 다리를 놓았는데 같은 의미가 있었다. 아무래도 문화가 서로 영향을 받으니 비슷한 듯 하다.

금천은 이 외에도 궁의 배수로 역할을 했으며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궁에서 위급시 소방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원래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향원정, 경회루에서 배수된 물이 이 금천을 따라 동쪽으로 나가 삼청동천(중학천)을 따라 청계천으로 흘러 한강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해체되는 아픔을 겪고 다시 복원되었지만 그때처럼 배수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천록은 해치와 마찬가지로 잡귀를 쫓는 역할을 했는데, 물을 타고 들어오는 나쁜 잡귀를 쫓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잡귀를 쫓는 얼굴이 별로 무섭지가 않다. 혀를 내밀고 있는 천록도 있는데,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해학미를 볼 수 있다. 다리 좌우 남북으로 각각 하나씩 총 4마리가 있는데, 약간씩 모습이 다르니 하나씩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이 될 듯 하다.

유화문

홍례문을 들어서 금천 너머 좌측을 보면 
유화문(維和門)이 보인다. 이 문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의 관원(신하)들이 경복궁을 출입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 영제교가 복원될 때 함께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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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태종5년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탔는데 곧 바로 다시 지은 후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 대체로 원래의 궁궐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인정전[국보 제225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다포 집으로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영친왕 내외 일행의 기념사진

1922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 일행이 귀국했을 당시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던 모습이다.

영화당 앞 영친왕내외


어수문

어수문은  정조 즉위년(1776)에 지은 2층 건물인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어수문 양 옆 협문으로 드나들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조선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였다.


창덕궁 희정당에 영친왕비가 차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


금천교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 물길 위에 설치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돌다리이다.

윗부분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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